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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예수님의 부활, Dale Allison

April 24, 2017
Q

저는 박사님께서 Dale C. Allison 의 최근 저서인 Resurrecting Jesus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저자는 기독교인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모습들에 대해 흥미로운 입장을 드러냅니다. 제가 알기로는 아직 적절한 답을 듣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근에 죽은 사람들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초 심리학적 분야에 꽤 많은 연구와 자료들이 있습니다. 이 모습은 한 명 보다 더 많은 사람이 볼 수 있으며, 다른 시간과 다른 위치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텅 빈 무덤은 문화의 전통적인 첫 입장이 아니고, 부활 후 모습이 원래부터 육체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전통적인 입장 : 예를 들면, 많은 학자들은 고린도전서 15:3-5의 본문이 텅 빈 무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환영을 봤을 때, 그들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예수님을 그 당시 유대교에서 중요하지 않던 개념인 부활을 그들이 유대교 개념의 부활에 적당히 새로운 기독교 교리를 맞춰서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글렌(Glenn)

Dr. craig’s response


A

저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회의적인 문제에 대해서 Allison 의 Resurrecting Jesus: The Earliest Christian Tradition and Its Interpreters(New York:T.&T. Clark, 2005) 보다 잘 서술한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Crossan, Ludemann, Goulder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을 거부하는 사람들보다 더 설득력 있는 서술을 합니다. Allison의 회의론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신 것, 무덤이 비어있었던 것, 죽음 후 나타나신 것을 단언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의 근원이 경합하는 다른 가설들에 비해서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라는 것을 단언할 뿐더러, 세계관을 근거로 어떤 이가 조사하는 것이 예수님의 역사적 부활 사건에 더 힘을 더해주는 증언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Allison의 중요한 주장 중 몇 가지에 대답하자면,
 


Proclivities and Doubts(성향과 의심)
 


그는 이 사건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싶은 이유와 믿고 싶지 않은 이유를 고백하면서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단언하고자 하는 성향을 갖는 네 가지 이유는 (1) 예수님의 가르침은 죽음 후에 극적인 지지 없이 그대로 있었고, (2)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이 이신론적 하나님보다 더 선호될 여지가 있으며, (3)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은 물질적 세상의 선함에 설득력 있는 단언이며, (4)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개인적 영생에 희망을 부여한다(p.214-219). 저 또한 이 성향들에 동의합니다.

Allison의 부활사건에 대한 의심의 중심은 시간이 흐름에 따른 연관성에 관한 철학적 문제입니다. 명백히 과학적인 문제 혹은 역사성에 대한 대화에 어떻게 철학적 쟁점이 방해하는지에 대해서는 매번 놀랍니다. Allison 은 육체적 몸이 완전히 없어진 상황에서 부활한 몸의 주체성과 육체적 몸을 연관시키는 것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습니다(p.219-228). 만약 시공간 연속성이 시간과 예수님의 정체성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라면, 육체적인 몸의 소멸에 의한 불연속성은 부활한 육체가 육체적인 몸의 복사본이지만 똑같은 몸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경우에는 그 몸이 부활했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예수님 부활 사건의 문자적 해석에 대해 Allison이 의심을 갖는 것은 특이하긴 합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예수님의 몸은 소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공간적 불연속성이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없었다는 일로 가정할 수 없습니다. 무덤에 있던 육체가 부활한 것은 명백해 보입니다(텅 빈 무덤). 육체가 완전히 소멸된 경우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데, 어떻게 이 결론이 조사자의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로 평가 할 때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Allison은 이와 같은 경우(위에서 말한 육체가 완전히 소멸된 경우)에는 예외, 즉 일탈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저에게 이 주장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유대교 믿음에게 부활의 주된 부분은 죽은 자의 뼈대이며 (더욱이 유대교 관습은 종말론적 부활을 기대하며 뼈대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뼈대는 내구성이 좋아 선사시대부터 남아있는 뼈들도 있습니다. 더욱이, 전세계적 재앙을 제외한다면, 지구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은 보장되어 있어서 죽은 지 오래된 자보다 근래에 죽는 자들이 항상 더 많을 것입니다. 그 문제를 빼고 이야기해 봅시다. 이런 교리적 문제는 우리의 자료의 역사적 평가와 연관성이 없습니다. 종말의 때에 부활이 일어난다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뼈대가 남아 있는 자의 몸은 그것을 일으켜 세우시고, 남아있지 않은 자에게는 새로운 육체를 만들어 선택하여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어떻게 이 것이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까?

저는 Allison의 진짜 문제는 단순히 육체적이고 형체를 가진 영생에 반대하는 흔한 선입견이라고 생각합니다. Allison은,“옳고 그름은 잘 모르지만 저는 지금까지 알아온 것처럼 물질적 육체의 제약에서 자유로운 미래의 실재를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체와 뼈의 회복에 이 세계에 있는 우리의 생명이 의존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그렇지 않다면 왜 예수에게 그러합니까?”(페이지 225,334). 그때서야 이 편견을 정당화 하려는 시도로 이 연관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들이 공격 받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육체가 사라진 사람들의 부활한 몸은 계수적으로 일치하는 몸이라기 보다는 기껏해야 육체의 복제 본이라는 것만 드러낼 뿐입니다. 이 것은 육체적인 형체를 가진 영생이라는 교리를 전혀 약화시키지 못합니다. Allison의 회의론은 그저 정당하지 않은 편견일 뿐입니다.

Allison이 믿는 것처럼 육체와 구분되는 영의 실재를 어떤 사람이 믿는다면, 육체가 복제되는 것은 사망하고 부활한 사람의 개인적인 정체성에 문제를 끼치지 않습니다. 유대 믿음은 육체가 죽으면 영이 종말의 때까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종말의 때에 사망한 육체가 다시 들어올려져 재구성되어 영이 육체와 결합될 것을 믿습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 중간의 상태를 상정하면서 들어 올려질 육체가 없더라도 개인의 정체성은 보장되었습니다. 개인 정체성의 문제는 유물론적 신학자 혹은 죽음 이후 영혼의 중간상태를 부정하는 신학자에게만 생깁니다. Allison 은 이원론자로서,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일으켜 세우실 때 개인의 정체성은 어떠한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죽어 육체가 소멸된 육체의 정체성과 예수님의 문자적 부활의 질문에 대한 의심이 관련 없음을 보여줍니다. 요약하자면, 이런 의심은 세 가지 이유로 관련이 없습니다: (1) 죽은 자의 부활에서 중요한 것은 육체의 정체성이 아닌 개인의 정체성이며, 이 개인의 정체성은 지속되는 영혼으로 보장받습니다; (2) 유대 믿음은 죽은 자의 뼈대가 다시 일으켜질 것이므로 엄격한 육체의 정체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3) 예수님에게 있어서 정체성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시공간 연속성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육체적 정체성의 필수적인 전제(Allison이 추론하는 대로)이냐는 질문에는 파고 들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저 하나님이 물리적 물체를 만들 수 없고, 파괴할 수 없으며, 그 물체를 다시 재창조 하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틀렸다는 점에서 매우 논란이 될 수 있는 주제임을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Trenton Merricks, “There are no criteria of identity over Time” Nous 33(1988): 106 – 124, 그는 시간경과에 따른 정체성에 유익하고, 필수적이고 충분한 조건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 경우에는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이 육체들은 죽은 육체의 소멸과 상관없이 동일할 수도 있습니다.

The Facts of the Matter(이 문제와 관련된 사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그 자체의 증거를 보기 이전에 먼저 Allison의 빈 무덤에 대한 입장을 봐야 합니다. Allison은 텅 빈 무덤을 분명히 신학적으로 업신여길 지라도 텅 빈 무덤이 후대에 전개된 전설이라는 당신(질문자 글렌)의 가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 맥락에서 아리마데의 요셉을 통해 Allison은 예수님의 매장의 역사성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합니다(페이지 252-263). Allison에 의해 전혀 지각되지 않은 그의 매장과 빈 무덤 이야기에 대한 대응 방식의 모순 중 하나는 요셉에 의해 매장되었을 가능성(E.g. 많은 증거, 전설적 윤색의 부족, 무덤 이야기의 부끄러울 정도의 특징, 이름의 올바른 사용, 무덤의 위치와 매장에 대한 대중의 지식)이 “무척 높다” 는 결론이 도출되는 자신 있고 자격 없는 의견이 사실상 똑같은 주장이 동시에 빈 무덤의 역사성을 지지하는데 이 주장을 Allison은 “많은 망설임을 갖고” 역사적으로 그럴 듯 하다고 여깁니다. 여기에는 분명히 이중 잣대가 작용하고 있으며, Allison의 영생이 없는 육체와 부활한 육체 사이에 물질적 연속성에 대한 그의 불쾌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Allison은 빈 무덤 사건에 대한 사실의 7가지 주장을 설득력을 순서로 해 오름차순으로 진단합니다

1. 유대인 비판은 텅 빈 무덤을 예상합니다. 사도들이 시체를 훔쳤다는 유대인들의 고발은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을 추정하게 합니다(마태복음 28:11-15). Allison은 유대 논쟁의 시대의 불확실성 때문에 이 주장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Allison이 생각하기에 왜 이 마태복음 본문(28:11-15)이 “‘꽤나 오래된 논쟁’의 흔적”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걸 고백하는데 있어서, Allison은 마태복음 무덤 경비 이야기 뒤에 숨어 있는 전통 역사의 주장과 반대 주장의 전개 과정을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 :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유대인 : “아니요, 사도들이 그의 시체를 훔친 것입니다.”

기독교인 : “무덤의 경비가 그러한 도둑질을 방지했을 것입니다.”

유대인 : “아니요, 경비가 잠들었어요.”

기독교인 : “사제 우두머리가 경비를 매수해 이런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예수 부활사건에 대한 기독교인 성명의 대답으로 유대인들의 반응은 그저 사도들이 시체를 훔쳤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경비에 대한 발상은 유대인으로부터 발전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부터 올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 단계에서 경비를 매수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발상해 낼 필요가 없습니다; 무덤에 경비가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한 언급입니다. 경비를 매수했다는 것은 경비가 잠들었다는 혐의라는 논쟁의 두 번째 대화에 대답하기 위해서만 등장합니다. 이 뒷부분의 이야기는 기독교 논쟁에서 어떠한 의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발전된 이야기라고만 봐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에, 그 시간의 마태의 기록에서, 경비가 매수되었다는 기독교인의 대답이 주어집니다. 마가 이전 수난 내러티브의 초기 시대(날짜)가 주어진 이상, 마가와 마태 사이에 분쟁이 있었다는 Allison의 추측에 더 이상 다툴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마가”라 함은 마가의 전통을 의미합니다.

2. 예수님의 무덤에 대한 존경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뼈가 그곳에 없었다는 사실이 좋은 설명이 됩니다. Allison은 무덤의 위치가 사실 기독교인의 기억에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이 주장을 부정합니다(페이지 313). 그러나 Allison의 주장은 핵심에서 벗어납니다. 핵심은 예수님의 시체가 기억되며, 보존되고 영광 받았어야 할 장소가 없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Allison에 의하면 이 장소는 유해한 범죄자들의 묘지였으며, 공경 받지 못한 장소였다는 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와 같이 매우 수치스러운 사건으로부터 구하지 못했고, 쉽게 도랑에 매장할 수 있다는 Allison의 주장과 모순됩니다(페이지 354). 예를 들면 예수님의 뼈대의 존재가 그 장소를 신성하게 했다는 것.(이것은 Allison이 증거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그저 하나의 내부적 갈등일 뿐입니다.)

3.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언급된 사도 바울의 방식은 텅 빈 무덤을 추정합니다. Allison은 신학적 배경에서 사도 바울이 텅 빈 무덤을 믿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줄지는 몰라도, 그가 실제적인 역사적 지식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반문합니다(페이지 316). 이 반문의 취약점은 한 편으로는 사복음서 이야기와 사도 바울에 의해 전해진 4줄 방식과 비교된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행전에 있는 사도들의 설교는 매장과 텅 빈 무덤 이야기의 두 번째 세 번째 줄을 요약해준다는 것입니다. 신기하게도, Allison 자신은 고린도전서 15장 3-8절이 다른 곳에서 전해진 전통적인 완전한 이야기의 요약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Allison의 증거를 대하는 방식에 있어 내부적 갈등의 다른 예시입니다.

4.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무덤에 예수님이 있는 채로 부활을 선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Allison의 회의론이 절박해 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Allison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에 너무 설득된 나머지 묘지에 다시 가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질문은 생각해 보면 사실 유치한 질문입니다(사도들이 다시 확인하고 예수님이 누워계신 곳을 보기 위해 가보지 않았다니요?). 또한 Allison 본인의 말인 무덤이 기독교인 기억에 보존되어 있다는 주장에 모순되기 까지 합니다. “이 무덤을 확인하는 작업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순간적으로 귀찮은, 사소한 일로만 생각해서(페이지 319)” 예루살렘 권위자들이 무덤을 다시 점검한 적이 없었다는 Allison의 주장이 비웃을 일입니다 – 이럼에도 불구하고 타르수스의 사울이 초대 예수 그리스도 운동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5. 텅 빈 무덤 이야기는 신학적이고 전설적인 꾸밈이 부족합니다. Allison 또한 동의하며, 이 것이 Allison이 매장 설명의 역사성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6. 예수님 사후의 환상 그 자체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초대 믿음을 설명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글렌, 당신이 지적한 대로 Allison은 최근에 사별한, 죽은 사람들의 환상을 괜히 복잡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그는, “예수님의 육체가 그대로 살아 돌아왔다고 믿을 이유가 없다면, 기대와는 반대로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후의 예수님을 인지할 수 있는 만남과 환상을 경험하는 것이 그 자체로 이유를 제공했으며, ……..

그렇기에 무덤은 아마 비어있었을 것입니다.

7. 무덤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은 여성들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그 어떠한 요인도 텅 빈 무덤의 역사성에 이러한 설득력 있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여성 증인들의 역할 때문입니다. Allison 또한 예외는 아닙니다.

Allison은 빈 무덤과 관련된 적당한 예가 있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립니다(페이지 331). 우리는 이 결론이 부족한(understatement) 표현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텅 빈 무덤은 모든 면에서 예수님의 매장의 사건보다 일어났을 가능성이 더 강력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Allison은 텅 빈 무덤 사례에 반대되는 더 수준 높은 사례가 있다고 또한 주장합니다(페이지 331). 이 주장은 놀랍습니다. 이 수준 높다고 하는 사례는 고작 두 개의 주장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 “초대 기독교인들의 허구를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둘째, “없어진 사체에 대해 존재하는 수많은 전설” 입니다(페이지 332). 그러나 위의 두 가지 주장은 아무리 강력한 주장일지 하더라도 텅 빈 무덤 이야기는 전설일 뿐이라는 확률을 보여줍니다. 대속과 매장 이야기에도 동일한 확률이 있습니다. 이 확률은 우리가 특정한 근거를 진단해보기 이전에 우리의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근거로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주장들은 특정한 근거의 진단을 기본으로 하더라도 텅 빈 무덤 이야기가 소설 혹은 전설이라는 결론을 전혀 보여주지 못합니다. Allison이 전반적인 배경 지식을 기반으로 선험적 확률을 반대하는 특정한 근거를 생각하였다는 것은 저에게는 충격적입니다.

짧게 말하면, 예수님의 텅 빈 무덤의 발견은 그 어느 때 보다 강력한 Allison의 정밀 조사로부터 나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후 모습의 문제로 주제를 바꿉니다. Allison은 예수님의 사후 모습의 역사성을 베드로와 그 외 사도들, 막달라 마리아와 많은 사람들의 편에서 주장합니다. 저는 Allison의 세부 사항에 관해 트집을 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Allison이 그리스도교인에게 나타난 모습들이 무척 많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나타난 모습들과 독립적인 증명을 하려고 하는 시도 말입니다. 마가가 그리스도교인에게 나타난 모습의 복선을 드러낸 것이 예루살렘에서 나타나신 것이 먼저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을 어떻게도 수반하지 않습니다(예시로, 마태복음의 여인에게 나타나신 것). Allison과 대조되게 요한복음 21장에서 사도들이 낚시하는 이야기는 사도들의 예전 삶의 방식으로의 돌아감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다니엘과 도마 둘 다 어부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들은 일단 지나갑시다. Allison은 다양한 사람과 그룹에게 나타나신 사후의 예수님의 모습의 역사성과 관련된 학문적인 합의에 동의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갑자기, 그리고 진정성있게 믿기 시작합니다. Allison은 이 것을 독립적인 요점으로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 또한 이 사실을 계속해서 인지합니다.

Allison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셨다는 추측을 가장 잘 설명하는 세 가지 사실을 인지합니다. 그렇다면 Allison은 이 사실들을 설명하며 어떤 말을 덧붙일까요?

사실들을 설명 (Explaining the Facts)

Allison은 토마스 라이트(N.T. Wright)의 주장인 “가장 적절한 역사적 설명으로 … 는 예수님은 죽음에서 정말로 육체적인 부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페이지 345) ”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Allison은 부활에 대한 증거가 조사하는 사람의 세계관에 도전할 수 없다고 항의합니다. Allison는 자연주의자에게는 예수님의 부활 추측보다 우주 외계인의 유괴가 아마 더 좋은 설명일 것이라고 합니다. “확률은 보는 사람의 생각에 달린 것입니다. 부활 이야기가 맞던 틀리던, 보는 사람의 세계관에 따른 문제라는 (페이지 340)” 것을 말하기 위해 이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문자적인 주장은 보는 사람의 세계관을 설립시킬 수 없습니다(페이지 342)”, 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는 여러 가지 혼란이 있습니다. 첫째로, 전통적인 사례에 따르면 유신론적 사건이 제안되었을 경우에만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역사적 변증이 시작됩니다(이에 관해서는 저의 책 The Historical Argument for the Resurrection of Jesus during the Deist Controversy[Lewiston, N.Y.:Edwin Mellen, 1985] 을 보십시오.” 그렇기에 자연주의적 세계관을 믿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로 그의 세계관을 바꾸도록 설득시키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연주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세계관을 바꾸도록 설득시킬 때에는 우주론적, 목적론적, 도덕적 논증과 같은 유신론을 입증하는 다른 논증들을 제시해줘야 합니다. 유신론적 세계관이 주어진 이상 질문은 바뀝니다. 텅 빈 무덤의 증거, 예수님의 사후 모습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사도들의 믿음의 기반에 관한 가장 좋은 질문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Allison의 답변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의견을 요구하는 증거에 관한 극단적인 언급들을 주장하는 것을 만족하는 것처럼 보입니다(페이지 347; N.B. McDowell 은 사실 증거만이 의견을 요구한다는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탄탄한 자연주의적 신학 체계를 갖고 증거를 가져오는 사람(예시 : R. Swinburne, S. Davis)이 어떻게 대립하는 추측들을 평가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는 일체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않습니다(페이지 341, 노트 557)

둘째로, Allison은 확률들이 주관적이라는 것을 조건적이라는 사실을 혼동합니다. 확률은 정보의 본문과 상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보가 변하면 확률도 변합니다. 동전을 뒤집었을 때 앞면이 나올 것이라는 확률은 동전이 평범한 동전이라는 정보에 근거해 0.5라는 확률이 나옵니다. 그러나 동전이 정상적인 동전이 아니라는 정보에 근거한다면,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은 0.5보다 높거나 낮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률은 언제나 조건적으로 표현됩니다. : PR(A/B)는 A에 대한 B의 확률, 혹은 B가 주어졌을 때 A의 확률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가설 A에 관한 확률을 정확히 알아내기 위해서 배경 정보인 B가 정확한 것이 중요합니다. 정확하지 않는다면 잘못된 측정치가 결과로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동전 예시가 설명하듯이, 확률이 조건적이라는 사실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있다”는 결론을 전혀 암시하지 않습니다.

Allison의 주장의 진실인 부분은 이것입니다. 전체 증거에 기반한 부활 가설의 확률은 이 가설에 관련한 어떠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외한 일반적인 배경 정보의 확률에 의존합니다. 이것은 확률 미·적분학의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R = 예수의 부활, E =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 그리고 B = 구체적인 증거를 제외한 우리의 배경 지식 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Bayes’ 정리는

(따라오세요!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이 공식의 왼편은 우리의 배경 지식과 부활에 관련한 구체적인 증거가 주어졌을 때 부활의 확률에 해당합니다. 공식 오른편에서 첫 번째 구성 확률은 Pr(R/B)으로 구체적인 증거를 제외하는 부활의 확률에 해당합니다. 만약 B가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을 사실을 내포한다면, Pr(R/B)는 턱없이 낮을 것입니다. 이 확률은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모두는 이 측정치에 동의합니다.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곳은 하나님의 비실재가 사실이며, B에 내포되냐는 것입니다.

Allison은 확률이 그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B에 포함되는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기 위한 그의 방식은 당신이 무엇을 믿는가를 들여다보고, 자기 성찰로 분석합니다. 그는 조언하길, “우리는 문서들을 상세히 살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도 면밀히 살펴봐야 합니다(페이지 343)”. 그가 조언하기 실패한 부분은 B에 들어가는 믿음의 증거들과 주장들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기 성찰은 논증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예수 부활 논증의 전통적인 지지자들은 이 점을 이해했고,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논거들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아마도 예수님의 삶과 사역, 그리고 개인적인 언급들이 Pr(R/B)를 측정하는데 필요한 배경 지식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덧붙일 내용으로)배경 지식에 이러한 사실들을 포함시켜 확률을 보더라도, 부활 사건의 이전(prior) 확률은 턱없이 낮을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자연주의에 관해서는 부활은 절망적일 정도로 사실이 아닐 것이라는 자연주의자와 동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토론의 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어떤 사람의 적절한 신앙 배경들이 어떤 타당한 이유를 갖는지 입니다.

셋째로, Allison은 사람들이 그들의 신앙 배경의 고집과 확신을 갖는 다른 정도(degree)를 고려하는데 실패합니다. 그는 다시금 증거에 접근하는 사람들의 극단적인 예시만을 고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실한 신념과 확신을 갖고(페이지 340)” 말입니다. 그러나 소련 혹은 중국 사회에서 자란 결과로 생각 없이, 혹은 가볍게 갖고 있는 문화적 치장인 무신론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신론이라는 세계관에 부활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쉽게 무신론을 버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들이 만약 증거들이 대치하는 가설들보다 부활 가설에 의해 더 쉽게 설명된다는 것에 설득된다면, 그들은 더 좋은 설명을 수용하기 위해 그들의 세계관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사람이 불가지론자라고 해봅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실재와 관련해서 탐색하며 열린 자세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런 사람 또한 대치하는 가설보다 부활 가설에 의해 더 잘 설명되는 증거들에 설득되어 유신론적 세계관을 수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것이 가능할 뿐더러, 사실 자주 일어납니다. Allison은 세계관을 바꾸는 것이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있어서 좋은 이유를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렇더라도,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논증에 관한 Allison의 발언에 진지한 반대가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베이즈 정리의 “odds form”은 이렇게 논술합니다 :

베이즈 정리의 Odds form은 전체 증거가 주어졌을 때 부활의 확률과 전체 증거가 주어졌을 때 부활이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의 비율을 계산합니다. 만약 비율이 1/1 이라면, R 과 not-R은 같은 확률이 있는 것입니다; R이 일어났을 확률은 0.5 혹은 50% 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일어났을 확률이 높은지 낮은지는 공식 오른편에 있는 비율에 의해 결정됩니다. 오른편의 첫 번째 항을 결론짓기 위해, 우리는 일반적인 배경 지식이 주어졌을 때 R 과 not-R 둘 중 어떤 사건이 더 가능성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 항을 결론짓기 위해 R과 not-R 둘 중 무엇이 더 특정한 증거를 가능성 있게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R 과 not-R 중 어떤 사건이 우리의 특정한 증거를 더 잘 설명하는지 물어봐야 합니다. Allison은 가끔 이 마지막 비율이 1/1에 매우 가깝다고 제안합니다. 다시 말해서 특정한 증거들은 R 과 not-R 둘 다 동일하게 좋은 설명을 한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면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떠난 사람들과의 표면적인 만남은 … 드물지 않습니다. 더욱이, … 사람들은 간혹 유령들을 귀신같은 그림자로 인지하지 않고 실재하는 입체라고 인지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부활 이후 모습들, 물질초월적인 모습들과 관련해서 폭 넓은 현상과 같은 비정통적인 입장의 방지한다는 것입니까? 유대교 종말론과 부활절 이전 사도들의 기대를 약간 섞어놓는다면, 정답입니다!

그렇다면 텅 빈 무덤에 관해서는 어떠합니까? 이것 또한 신성한 개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모든 기적들과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당연하게 거부하는 자들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이 죽음에서 일어났을 때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치거나 옮겼다는 것을 생각하기 쉬울 것 입니다. 저는 이 논증에서 세계관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당황스럽습니다. (페이지 347)

Allison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에 다시금 도전하려고 하면서 자신의 논증에 흠을 가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본 것처럼 관심을 주위로 돌리려는 것입니다. 일단 이 문제는 치워두더라도, 제 생각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논증에 중요한 도전이 남아있습니다. Allison은 R과 not-R의 설명하는 영향력이 대략 비슷하다는 듯한 주장을 합니다. 이것은 부활과 같은 기적이 배경 지식 그 자체로만 not-R보다 가능성이 없다면, 전체 증거에 의한 R의 확률은 0.5보다 낮게 나올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의 전적으로 역사적인 사건임을 약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R 과 not-R이 정말로 대략 동일한 설명의 영향력을 갖고 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후 모습들을 고려해 봅시다. 의심의 여지 없이, 예수 부활 토론에 있어 Allison의 가장 흥미로운 성과는 사별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최근에 사망한 사람들의 모습(vision, 혹은 환상)의 초 심리학적, 심리학적 문학의 빈틈없는 분석입니다. Allison은 이 경험들과 예수님의 사후 모습을 드러내심이 얼마나 비슷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길게 서술합니다. 18세기의 자연을 설명하는 수업의 지지자 같이, Allison은 사후 예수님의 모습들이 그 자체로 전설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 나타난 이야기들의 역사성을 논증하기 위해 이러한 시각적인 경험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 계략은 트로이의 목마로 이해됩니다. 부활의 모습들이 전형적인 (사별한 사람들의)환상으로 인해 지금으로서는 설명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학과 관련한 Allison의 익숙함은 저를 주눅들게 까지 합니다. 그의 저서의 페이지 279-282는 16줄의 본문과 좋은 200줄의 언급(reference)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서지학자로서 그의 강점은 곧 약점이 됩니다. 모든 리포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어 심리학 학술지의 진지한 연구들과 초 심리학 분야의 뉴 에이지(New Age) 시대의 대중적인 책들과 출판들을 한 무더기로 묶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들에 대한 소위 말하는 현실적인 환상들의 대부분은 19세기 후반의 초 심리학 문학에서 수집됩니다. 부족한 것은 증거의 조심스러운 감별과 같은 증거의 차별화된 토론입니다. Allison의 토론은 UFO 목격에 문학을 상기시켜 줍니다. 진지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같이 녹아 들어있어, 이런 경험들에 대해 어떤 사람이 어찌해야 할 지 모르는 큰 불확실성만 남겨버립니다.

저의 책에서 저는 사도들이 예수님이 환상으로 나타난 것을 경험했다는 가설의 주장 때문에 라도 인정하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러한 설명이 부활 가설에 비교되었을 때 좋은 설명이 되는 기준을 갖추었는지 물어보는 것을 선호합니다.

예로 설명범위(explanatory scope)을 들어봅시다. 환상 가설은 좁은 설명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가설은 텅 빈 무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무덤이 비어있던 것을 부정하거나 텅 빈 무덤을 설명하기 위해 매장과 같은 다른 독립적인 가설을 환상 가설과 결합시켜야 합니다. 이 비평에 대한 Allison의 반응은 설명범위가 이론 평가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이 아닐뿐더러 유일한 기준도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게 해줍니다. 또한, 역사적 사건들을 일반적으로 복합적인 원인을 갖고 있습니다(페이지 347-348). 좋습니다. 그러나, 모두 같을 때, 더 간단한 가설이 선호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지막 평가를 내리기 이전에 환상 가설의 설명범위, 타당성 등을 우리 모두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빈 무덤을 설명하기 실패한 것은 환상 가설의 가장 큰 결함입니다.

다시금, 환상 가설은 예수 부활에 대한 사도들의 믿음의 기원에 대해 그 어떠한 설명도 내놓지 못합니다. Allison은 사후 예수의 모습과, 최근에 사별한 사람들의 주변사람들이 본 환상들 사이에 근거 없는(alleged similarities) 공통점을 주장해 이를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사별한 사람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아무리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보이더라도, 죽은 자들이 육체적으로 살아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 오히려 죽은 자들이 죽은 후에 환상으로 보였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Wright(N.T. Wright)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죽은 자들에 대한 환상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죽었다는 증거가 된다고 주시합니다.

더욱이, 유대인의 맥락에서 이러한 경험에 대한 부활보다 더 적절한 다른 해석들이 더 적당합니다. Dunn은 요구하길,

사도들은 왜 꼭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까? - 왜 그저 죽은 사람의 환상이 아닙니까? – 왜 영광의 구름에 등장하거나 이와 비슷한 종말론적 기대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장치를 가진 그런 환상이 아니었습니까. . . . ? 왜 일반적인 부활 이전과 이후와 분리된 종말론적 부활은 이미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라는 엄청난 결론을 이끌어냈습니까?(Jesus and the Spirit London: SCM, 1975], p.132)

Dunn의 마지막 질문이 보여주듯이, “그는 죽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라는 언급은, 우리 귀에 매우 익숙하지만 1세기 유대인에게는 완전히 부자연스러운 언급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생각에는 사도들의 상정된 경험을 설명하기에 이미 완벽한 범주(category)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으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부활절 이전의 사도들의 기대와 약간의 유대교 종말론을 섞는” Allison의 의도는 역 효과를 낳았습니다.

Allison 자신 또한 “예수님의 육체 자체가 생명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믿을 만한 이유가 없다면 기대와는 반대로 그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라고 인정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사후 모습과의 인지된 대면 혹은 환상들은 그 자체로 그러한 이유를 제공할 수 없습니다(페이지 324-325)”. 남은 질문은 그러한 사별한 사람들의 환상이 텅 빈 무덤을 발견과 함께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사도들의 믿음과 선언들로 이끌었는지 입니다.

답은, no 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도들은 죽음에서 일어나셨다는 표현 대신 끽해야 천국으로 옮겨 가셨다, 혹은 승천하셨다는 표현을 쓰셨을 것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에녹과 엘리야 같은 인물들은 죽지 않고 곧장 천국으로 옮겨진 인물들로 비춰집니다. The testament of Job(40) 이라는 정경 외의 유대 글에서 집의 붕괴 때 두 아이가 죽었지만 천국으로 옮겨진 이야기가 나옵니다. 집이 붕괴되었을 때 아이들은 죽었지만, 구조 자들이 와서 현장을 정리할 때 그들의 시체는 찾을 수 없었습니다. 도중에, 어머니는 두 아이들이 천국에서 영광을 받고, 하나님에 의해 옮겨진 환상을 봅니다. 이 것을 보아 유대교에서 부활과 승천은 다른 개념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승천은 어떤 사람이 이 세계 밖으로 가 천국으로 옮겨졌다는 추정입니다. 부활이란 우주-시간 세계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사도들이 유대교 종말론적 믿음에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을 선언했는지는 Allison의 가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아니면 설명력(explanatory power)을 고려해봅시다. 이 환상 가설은 예수님의 사후 모습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틀림없이 설명력의 힘이 약합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후 환상들을 경험한 지체 중 한 사람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이 가설은 부활 후의 모습들을 설명하는데 충분합니까? 그렇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양한 모습들이 심리학 사례집(casebook)에 나타난 모든 사례들의 장벽을 타파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나타나셨습니다. 한 개인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개인 뿐만 아니라 다양한 모임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신자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 적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도들 사이에 연쇄 작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부적합합니다. 야고보와 바울과 같은 사람들은 이 연쇄 작용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Allison은 여러 종류의 관련 없는 환상경험들의 사례들을 엮음으로서 혼합된 가설을 만드는데 강제합니다. 이 것은 그저 심리학 사례집에 부활 후 모습들에 대한 어떠한 사례가 없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타당성을 한번 고려해 봅시다. Allison의 가설이 타당해 보이지 않는 한가지 이유는 한낱 환상 경험이라고 부활 후 모습들을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바울 또한 예수님에 대한 환상과 예수님의 모습의 개념 구분을 합니다(언어적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모습은 곧 없어졌지만, 환상은 초대 교회에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과 모습 사이에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Allison은 “어떤 이는 그저 누가와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현을 후대의 경험들과 다른 것으로 상상했는지 궁금해 할 뿐입니다.” 라고 답을 하지 못하며 사색합니다. 제 생각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꽤 확실해 보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환상은 그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인 반면 부활 후 모습들은 다른 곳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한 모습과 사도행전 7장에서 나오는 스데반의 예수님의 환상을 비교하는 것을 유익할 것입니다. 비록 스데반이 구분 가능한 신체의 이미지를 보았다고 해도, 그가 본 것은 그 사람의 환상이지 육체 자신이 앞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곳에 있었던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경험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조적으로, 부활 이후의 모습은 “우리 세계”에서 일어났으며,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이 경험 할 수 있었습니다. 이 대답은 중요합니다. 얼마나 실제적이며, 보이며, 불투명하더라도,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에게 떠난 이의 환상은 그저 외부의 물체인 것으로만 나타납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환상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아차립니다. 초대 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환상에 익숙했고, 부활 이후의 모습들은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계속해서 말할 수 있지만, 대신 텅 빈 무덤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자연주의자들은 어떤 이가 시체를 훔쳤다는 가설을 더 쉽게 받아들이겠지만, 어떻게 자연주의적 추정과 독립적으로 이 가설을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금 넓은 설명 범위를 갖는데 실패할 것입니다. 텅 빈 무덤이라는 많은 증거의 한 측면만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수의의 발견과 같은 세부 사항을 설명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텅 빈 무덤과는 충분한 설명력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세부사항이 역사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독립적으로 입증 될 것입니다. 가설의 가장 취약한 점은 타당성과 즉석성(ad hoc-ness) 일지도 모릅니다. Allison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주술사가 예수님의 시체를 주술의 용도로 훔쳤을 것이라고 제안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추측을 지지하기 위해 인용하는 문서들은 모두 유대인의 것도, 팔레스타인의 것도, 동시대의 것도 아닙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과 관련이 없습니다 .

할 말이 무척 더 많지만, 저의 방향을 당신이 이해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튼튼한 자연주의 신학을 가진 사람이 Pr(R/B) 극단적으로 작지 않고 Pr(E/R&B)가 Pr(E/not-R&B)보다 높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ee my Reasonable Faith(Wheaton, Ill.: Crossway, 1994).

- William Lane Craig